임진왜란과 빙자호란을 기친 뒤 위와 같은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구조는 변화를 보이며 위기에 부딪쳤다. 첫째, 양란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기반의 동요, 둘째, 중앙집권층의 빌열화와 지배층의 분열, 셋째,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이에 따른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것이었다.(이해준, 「조선후기 향촌사회배구조의 변화」, 『한국사 -- 중세사회의 해체)
이를 부연해 설명하면 재지 사족들이 문중의 힘과 향약을 이용해 향권을 장악해 평민과 천민을 압제했고, 중앙 권력을 척족세력이 쥐고 일부 벌열가 (國家)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당쟁이 격회되었고, 이앙법(秋法)의 보급으로 잉여농업생산력이 높아졌고, 화폐경제의 발달에 힘입어 잉여 생산물을 팔아 자본을 축적한 요호부농층이 등장해서 향촌 지배구조의 변화를 보인 것이다. 그 결과 조선후기에는 향권을 두고 사족끼리 쟁투를 벌이면서 향약은 상민 · 천민을 압제하는 도구로 전락했는데 정약용은 “향약은 도둑보다 더 폐단이 많다.”고 지적할 지경이었다.
또 재지 사족들은 면천(免陵)에 따른 양반층의 증가와 노비 도망 등으로 몰락을 거듭했다. 재지 사족에 맞서 지방 권력에 도전한 세력은 이향(吏鄕)이었다. 이들은 향권을 두고 수령과 결탁해서 사족의 지배질서를 무너뜨렸다. 재지 사족 출신의 좌수 별감은 단순한 자문이나 하는 수준으로 밀려나고 수령권이 강화되고 아전이라 불리는 이향이 삼정의 수취 등 권한을 틀어쥐었다. 아전들은 지방 실정에 어두운 수령을 등에 업고 지방 권력을 장악했던 것이다. 이들은 아전을 중심으로 요호부민(德戶富民) 그리고 중인으로 짜여져 향권을 장악하고서 기층민중인 평민 천민을 대상으로 수탈 구조를 만들어내고 작폐를 일삼았다.
또 요호부민들은 수령 아전과 결탁해 전호(戶)에게서 도조를 과도하게받아 내는 횡포를 부렸다. 재지 사족들은 향권에서 밀려나 서원 중심으로 결속했다. 지방장관인 수령은 정해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주 갈려 지방실정에 어두워서 아전에 기대서 지방행정을 펼쳤고 이에 따라 수탈 체게도 가중되었다.
한편 조선후기에 들어 향약의 대안으로 주민 중심의 동계(契)가 조직되었다. 동계는 온 마을 사람을 하나로 묶어 교화를 하고 질서를 잡는다는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양반과 상인, 적자와 서자, 상전과 종의 관계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때로는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고 상놈이 양반에 대든다.든지 하면 회초리를 때리는 따위 사형(私刑)을 가하기도 했다. 또 공동으로 재원을 마련해 혼인과 상례에 부조를 했으며, 마을에 천재지변 따위 재앙이 일어나면 공동으로 다리를 가설하는 등 작업을 했다. 또 조세를 납기일 안에 내라는 독려를 하기도 했다.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과부가 서방질을 하면 등에 끈을 단 북을 매달아 소리를 내면서 동네를 돌게 한 뒤 마을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동계의 동약은 합의체로 이루어지지만 향약처럼 양반 사족이 주도해 평민의 권한이 적었다. 평민들은 차츰 동계에서 떨어져 나가 따로 하계(下契)또는 촌계(契)를 조직했다. 하계는 평민들이 주도했으므로 많은 동민들이 차츰 하계에 들어가서 구성원들이 더 늘어나서 동계는 차츰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래서 재지 사족들은 18세기 이후 차츰 향촌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3) 두레는 마을 공동체의 모델
촌계는 두레와 결합하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두레는 조선 중기 이후 널리 퍼졌으며 18세기 이후 본격으로 조직되었다. 두레는 기본적으로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다. 조선후기 촌락은 양반, 상인, 서자, 구실아치, 백정 등 신분에 따라 집단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이 두레의 구성원이 되었다. 두레는 행정 조직이 아니므로 구성원의 자격에 기준이 없어 남녀, 곧 16세에서 60세까지 주민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다. 또 새로 가입하는 신참자들은 남자의 경우 볏섬을 들어 보여 힘자랑을 했고, 여자들은 길쌈 솜씨를 뽐내고서 가입했다. 두레의 본모습은 공동노동에 있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두레의 총책임자를 영좌 행수, 보좌하는 일꾼을 도감 또는 집사라 불렀고, 현장 책임자를 수총각, 회계와 잡무를 보는 유사, 밥을 맡은 식화주를 두었다. 경비는 추렴이라는 이름의 회비를 내기도 하지만 정초에 당산제를 지내면서 쌀 돈 따위를 걷기도 한다.
두레 일은 봄철, 대개 모내기부터 시작해 물대기, 김매기, 벼베기, 타작하기 과정을 거친다. 특히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전체 구성원이 동원된다. 모내기철이 되면 모든 임원이 합의해 모내기 논의 순번을 정한다. 일꾼이 없는 과부집의 논을 먼저 순번으로 정하고, 다음 논이 많은 집으로 순번이 매겨진다.
아침나절 일터에서는 두어 시간 일하고 국수 막걸리가 곁들여진 새참을 먹으며, 잠시라도 드러누워서는 안 되고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도 안 된다. 징을 울리면 신호에 따라 일을 시작하고 이어 점심을 먹는데, 이때에는 막걸리를 배불리 먹고 풍물을 울려 흥을 돋운다. 그러고 나서 30분 정도 잠을 자기도 하고 씨름을 하기도 한다. 오후 새참에는 별미인 묵이 나온다.
>한 집의 모내기를 할 때에는 그 집에서 음식 경비를 전담하지만, 여러 집의 논에 모내기를 할 때에는 모내기를 많이 한 집에서 주식을 부담하고 나머지 집에서는 술이나 새참을 준비한다. 두레꾼은 철저하게 규율을 지켜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한다. 벼베기나 타작에는 풍물을 줄이는 따위 약간의 순서가 다르기는 하나 그 기본 형식은 비슷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머슴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경비를 정산하기도 한다.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두레의 새 임원을 뽑는 일이었다. 지난 임원이 과오가 없으면 유임하는 경우가 많지만, 새 인물을 뽑아 능률 향상을 도모하기도 하고 당산제를 치를 걸립패를 구성한다.
한편 두레를 중심으로 계(契)를 조직했다. 계의 기본 목적은 구성원의 상호 부조, 친목 도모, 공동 출자를 통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였다. 계는 직업에 따라, 신분에 따라, 나이에 따라, 목적에 따라 여러 형태의 조직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동네 주민들이 구성원이 되는 촌계가 규모도 크고 목적이 뚜렷했다. 그 구성원이 수백 명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구성원은 곡식이든, 돈이든, 곶감 등 현물이든 일정한 가치의 물자를 냈다. 또 특수 목적에 따라농구계·우계 · 어망계 등 경제적 목적과 회갑계 · 동갑계 · 상제계 · 동향계 등 친목상조계 등이 작은 단위로 조직되었다. 이 소단위의 계들은 조직하기도 손쉬웠고 목적한 이익을 짧은 시일 안에 이룰 수 있었다.
촌계는 향약과 두레를 아우르는 공동 조직체였다. 그래서 여러 제재 규정도 두었고 규약을 어기면 축출하게 했다. 또 수령에 협조하기도 했지만 수령을 견제하는 역할도 했다. 여러 촌계 구성원이 향회(鄕會)를 집단으로 열어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수령을 꿇어앉히고 죄를 나열한 뒤 멍석말이를 해지경 밖으로 내쳤다. 삼남 농민봉기 당시 이런 사태가 많이 벌어졌는데 합법적 방법이었다. 오늘날 자치단체장의 주민소환제와 비슷하다고 할까?
1894년 동학농민군들은 향회와 두레 조직을 이용해 농민군을 규합하기도 했고 수령을 내치기도 했으며, 두레의 새 형태라 할 집강소를 통해 사채탕감이나 부정 사례의 고발이나 빈민 구제를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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