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선후기 향촌사회 지배구조와 영해지방의 동학 변혁운동

나우미카엘 2022. 1. 10. 08:59

4) 민이 회 신기

 

1신오는 미 수 시민은 난 신인인 신경에 따라 사인 수리에 신고 고기 미진 게 아이 소인이 생기 유기인 수 없있l, 1 2 는 기구 항운동을 번)이나이는 기 수 없있I. | 이 신은 있고 인구는 보부상 간위! 진한, 이민은 신 이기시 이진은 인구 기니 도시 인기에 시 지은은 이고 구간 등 인공했다. 이름이 이른바 사이 불안세이 미있니 깃이다.

 

한민 1) 세기에 '이시시는 이경민 중심으로 비긴사제도 등장했다. 곧양민을 주이자는 산반개, 상신을 죽이지는 신주게, 부호의 재산을 빼앗는다.는 신이기(火) 등이 조시베이 횡행했다. 또 수링과 이진 등 관료들의 수을 폭로하고 항의하는 이인··기회·투시 등이 벌이었다. 한핀으로는 관이 긴물에 메시() · 방시()를 붙이기도 하교 휴시(시)를 보내경고를 하기도 했다. 모 곳곳에서 고민)이 일이다. 관이를 들이치는음모를 꾸민다기나 반란을 도모하는 사건이 적발된 것이다. (이이화, 「19세기.기의 민란인구」, 『조신후기의 징치사상이 시회민동)

 

이런 일런의 과정에서 1812년 홍경래 주도의 관서 농민전쟁이 유발되었다. 정조가 죽은 뒤 안동 김씨들은 이른바 세도정치를 열고 관직과 이권을독점했으며 일부 발열가들이 끼이들었다. 무엇보다 세도정치는 삼정을 통해 불법 부정행위를 일삼았으며, 그 하수인으로 수령과 아전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 홍경래 등 몰락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이 유랑 지식인과 농민,도망 노비들을 모아 평안도 중심으로 일대 항쟁을 벌였다. 여기에 호응한세력으로 청나라와 무역을 하고 상업과 광업 그리고 수공업으로 생계를 잇고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합세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홍경래는 격문을 통해 관서지방의 차별과 칙족 세도정치의 비리와 도망노비의 처지를 옹호하는 봉기의 동기를 밝혔다. 이들은 많은 자금을 모으고 오랜 훈련을 통해 익힌 전투력을 동원해 평안도 일대를 휩쓸고 관아를 점령했다. 농민군들은 청천강 이북 지방을 장악했으나 중앙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홍경래는 민중의 영웅으로 받들어졌다.

 

1862년 삼남지방 중심의 농민항쟁은 그 지향이 조금 달랐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 세도정치는 더욱 민중들의 삶을 옥죄었고 삼정(三政)의 문란도 더욱 가속되었다. 특히 삼남지방의 수령과 아전들은 삼정을 통한 수탈 체제를 강화시켰다. 소작인들이 지주에 대한 항조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빈농이 부농, 상인,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항거에 따른 결과였다.

 

이 농민항쟁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도 · 황해도·함경도 일부 지방 등 71개 고을에서 전개되었다. 봉기 지역에서는 빈농들 수천 명 또는 수만 명이 모여 들었고, 수탈의 대상이 된 경영형 부농이나 몰락 양반이나 토호와 같은 지도층이 개재되어 있기도 했다. 이들은 향회에 모여 수령과 이서의 횡포와 부정을 폭로하거나 지적해서 하층민을 충동했다. 이들은 등소나 격쟁과 같은 합법적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수령을 불러내 시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아전을 잡아다가 모욕을 주거나 죽이기도 했다. 최초로 1862년 1월 일어난 경상도 단성의 경우, 동임 주민 그리고 사족 일부와 초군들이 모여 논의를 진행시켰다. 이들은 진주 동헌과 장터로 몰려가 경상우병사 백낙신을 불러내 요구 조건을 내걸고 모욕을 주고 그 하수인인 아전들을 잡아다가 구타하거나 죽이기도 했다. 이 사례는 대체로 다른 고을과 다름이 없이 진행되었다. 문제는 합법적 범위를 지키려고 수령을 죽이지 않고 모욕을 준 뒤에 쫓아내는 수준으로 마무리한 경우가 많았으며, 고을 경계를 넘어가지 않고 자기 경계 안에서만 활동을 전개해서 연대를 통한 조직성에 한계를 보였다. 그러므로 전국적 단위로 봉기한 수준에 이 기못하고 분산적 활동에 머물렀다.

 

중앙정부에서는 암행어사나 안책사 등을 보내 실정을 조사하기도 하다. 주모자 처빌과 함께 탐관오리도 처벌해 기강을 잡으려 했고, 제도의 보관 .통해 시정하려는 의지도 보였다. 중앙정부는 이 항쟁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이해하고 삼정이정청을 두어 개선하려 했으나 농민항쟁이 감갈해지자 흐지부지 끝내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은 이의 모순을 해결하려 호포법, 사창제 등을 실시했으나 그 근본적 개혁 대책이 될 수 없었다. (망원 한국연구실, 『1862년 농민항쟁 --중세말기 전국농민들의 반봉건투쟁』)

 

이렇게 왜곡된 수령권은 심한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신향이라 불리던 이향 세력이 농단하던 향촌 지배권은 동요하게 되었다. 최제우는 이런 시대배경과 민심의 동향을 살펴보고 인시천(人是天)과 개벽 시대의 도래를 내걸고 동학을 창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