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동학의 영해지방 변혁운동

나우미카엘 2022. 1. 10. 08:10

최제우가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을 당한 뒤 최시형은 잠행을 거듭하면서 7년쯤 포덕 활동을 벌였다. 최시형은 강원도를 중심으로 포덕을 하다가 충청도와 경상좌도로 진출해 많은 동학교도를 확보했다. 따라서 동학 조직이 확대되었고 그 결과 동학의 재건을 이룩했던 것이다.

 

1) 변혁운동가 이필제의 등장

 

이 무렵 최시형은 영양·영해 등지에서 활동을 벌였다. 유랑지식인이요변혁운동가인 이필제는 1870년 7월에 영해에 나타났다. 이필제에 대한 의급부의 최종 결인()에는 다음과 같이 쓰이 있다.

 

본디 사나고 모진 성품으로 평소에 휴역의 계획을 품고서 호중과 영남에 출몰하이 도당을 끌이 모으고 도참의 실을 빙자해 인심을 선동하였다. 마음속에 읽힌 것은 유인을 피뜨리고 비방하는 말을 만드는 것이요 마음속에 품은 것은 빙사를 핑계데이 난을 부르는 것인데 변란을 일으킨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난을 일으킨 곳은 진천 진주 영해인데 몸을 바꾸는 게 헤아릴 수 없었다. 그 이름은 명숙 성칠 제발로 바꾸었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헤아릴 수가 없었다. 흉측한 속임수가 더욱 심해 유회(儒會)라고 거짓 핑계대고 비류를 조령에 끌어 모았고 무기를 빼앗고자 미친 칼날을 관가에 들이댔다. (이 이화, 「동학농민혁명에 나타난 남북접의 갈등」,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이필제 관련 관찬 기록은 「경상감영계록」, 「추안급국안」, 「우포도청등록」, 동학관련 기록으로는 「도원기서」, 「천도교교회초고」 등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필제의 행적을 요약해 적었다. 그는 충청도 결성 출신으로 무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나서 공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관가의 주목을 받자 충청도 내륙으로 내달렸다. 그는 병서와 비기에 밝은 유랑 지식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능숙한 변설로 사람을 끌어들여 변란을 모의했다.

 

그 자신은 영해의 동학교도들을 만나 계해년(1863년)에 용담으로 최제우를 찾아가 수운 선생으로부터 도를 받았다고 말했다. 또 이해 10월 무렵, 최제우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과천에서 철종의 승하로, 경상감영으로 이관되는 도중에 조령에 이르렀을 때 교도 수백 명이 길가에서 횃불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맞이했다. 이필제 자신은 이때 동학에 입도했다고 했다. 이는앞뒤 정황으로 상당한 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뒤에 그는 때로는 이름을 바꾸고 때로는 명화적으로 위장해 자금을 모으려 했고, 암행어사를 위장해 가짜 출두를 해서 자금을 모으려 했으며, 긴 주의 경상우병영을 습격하려 하기도 했다. 지리산 덕산과 전라좌도 일대에서 활동할 때 체포의 위기에 놓이자 몸을 날려 경상도 태백산 언저리와 강원도 등지로 진출했다.

 

이필제는 영해에서 두 계통의 인물을 접촉한 것으로 드러난다. 하나는 공주·진천 등지에 만나 모의한 김낙균 등 동모자를 만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영해의 동학교도들을 만난 것이다. 그는 소문을 듣고 영해 창수면 병풍바위 산중에 사는 박사헌을 찾아갔다. 박사헌은 영해접주 박하선의 아들이었는데 박사헌은 관가의 고문을 받아 죽었다. 이필제가 이곳에 살겠다고 제의하자 박사헌이 받아들였다. 이필제는 박사헌의 비롯해 이수용, 권일언, 박군서 등을 설득해 교조신원을 하자고 선동을 하여 호응을 받았다.(표영삼,『동학 1』, 「영해교조신원운동」)

 

이해 10월에 이필제는 동학교도인 이인언을 일월산 용하동에 거접하고 있는 최시형에게 보내, 정가 성을 가진 인물이 교조신원운동을 벌이자고 하니 한 번 만나보라고 권고하게 시켰다. 최시형은 계해년에 입도했다면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가 성을 가진 인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이필제는 연달아 다섯 차례나 사람을 보내 이필제를 만나보라고 권고하게 꼬드겼다.

 

최시형은 마지못해 병풍바위로 와서 이필제를 만났다. 이필제는 최시형에게 동문(同門)이라 밝히고 선사(先師)의 원통함을 풀어주기 위해 거사를 하자고 요청했고, 최시형은 시기를 기다리고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고 타일렀다 한다. 하지만 이필제는 이때 최시형을 협박했다고 한다.(위 「도원기서」에나옴) 이런 곡절을 기차 최시형과 이필제는 손을 잡고 교조신원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최시형은 많은 교인들이 이필제의 설득으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