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은 끝내 동의해서 이필제와 손을 잡고서 이해 10월 10일에 병풍바위 박사헌 집으로 모이라고 동학교도들에게 통고했다. 박사헌 집에서는 조총 몇 자루와 칼과 죽창 등을 모으고 별무사가 입을 청색옷과 유건, 천제에 사용할 소 두 마리와 제수도 마련했다. 마침내 이필제는 무리 5백여 명을 불러 모으고 3월 10일에 출정식이라 할 천제를 지냈다. 참가 지역은 영해 · 평해·울진·진보 · 영야 ·안동·영덕·청하· 흥해 · 연일 · 경주·울산·..... 장기 · 상주·대구 등지였으며, 중군 · 참모 등 부서도 정하고 군복 차림도 했다. 이 정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천제를 거행할 새, 지난 날 정으로 성을 쓰던 자, 갑자기 그 본성을 드러내어 이가라 하며 이날 밤에 영해부에 돌입하여 공청에 방화하고 군기를 탈취하니 본부 별포군이 어쩔 줄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지다. 필제 스스로 따르는 무리 몇 사람과 더불어 동헌에 곧바로 들어가 부사 이정을 살해했다 .… 필제본시 목천의 난도로서 본성 이를 정이라 바꾸고 동해 가에 숨어서 도인들이 무리를 사랑함을 듣고 불측한 마음을 품고 도당을 불러 모아 도인이라 가칭하고 해도(害道) 역리(道理)의 일을 감행하였더라.(위 「도원기서」)
이필제는 김낙균 등 수하를 거느리고 동학교도를 강제로 끌어들여 영해부를 습격해 반역질을 했다고 기술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시형은 동조자가 아니라 강요에 의해 따라갔다는 분위기를 깐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기록에 대해 표영삼은, 여기에 참가한 강사원이 뒷날 비난을 감안해 최시형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사실과 다른 기록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그날 밤 이필제는 제주가 되어 축문을 지었고 일반인은 홍(紅), 동학도는 청(靑)으로 군호로 하라고 지시했다. 직계 수하들과 동학교도에게 유건을 씌워서 선비를 가장하고, 손에 죽창과 조총을 들고 대오를 나누어 밤 9시 무렵 영해부의 서문과 남문을 포위했다. 이때 이방 두 사람이 나와 성문을 열어주고 마음 놓고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먼저 부내의 동정을 살피고 횃불을 밝힌 대오가 앞장을 서고 백기를 허리에 꽂은 무리들이 뒤를 이어 쳐들어갈 때, 수직하던 수교가 마구 발포를 해서 한 사람이 죽고 행동대장인 강사원이 부상을 입었다. 봉기군은 잠시 후퇴했다가 진격하자 군교와 구실아치들은 모두 달아났다. 봉기군들은 맨 먼저 군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거두고 동헌에 불을 질렀다. 동헌으로 뛰어들어 도망치러 나오던 부사 이정을 잡아 앞뜰에 꿇어 앉혔다.
이필제는 김낙균, 강시원 등과 대청에 올라 부사의 인부를 빼앗고 “너는 나라의 녹을 먹은 신하로서 정사를 잘못해 세상을 어지럽혔다.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하기가 저와 같았으니 그래서 네거리에 방문이 나붙게 되었고 시중에는 원성이 높아졌다. 이게 읍내의 실정이니 네 죄가 어디에 가겠는가? 용서해 주고 싶지만 탐관오리인 부사 이정은 의리로 죽인다.”고 외쳤다.(위 「도원기서」) 이정은 환도에 찔려 죽었다. 이정은 탐관오리로 악명이 높았는데도 조정에서는 순절했다고 해서 이조판서로 추증했다.
이들은 성중을 손아귀에 넣고 호령하면서 소를 잡아 나누어 먹였다. 또 관아에 보관되어 있는 돈 궤짝을 부수어서 140냥을 꺼내 1백냥은 동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40냥을 경비로 사용했다. 그들은 민간에서 밥이나술을 가져갈 적에도 꼭 돈을 지불했다. 이들은 하룻밤 호기를 부렸고 이필제는 하룻밤을 부내에서 보낸 뒤 영덕 관아를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쳐서 진격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필제는 이 기사 과정에서 한번도 교조신원은 말하지 않고 조정과 수령의 비리만을 나열해 교도들을 실망시켰다.
이들은 정오가 지난 뒤 토벌군이 오기 전에 스스로 물러갔다. 이들은 영양 일월산 쪽으로 달아나면서 양반 부호의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필제 등 지도부는 최시형이 기다리고 있는 일월산 용화동에 들어가서 토벌군에 맞서 유격전을 벌이려 하였다. 끝내 수십 명이 잡혀갔다.(경상감영계록」 등 종합. 이이화, 『인물한국사 4』, 「시대에 맞선 풍운아들, 이필제)
포로들의 입을 통해 참여한 봉기군들이 동학교도라는 것이 알려져 그 주모자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고 일대 수색이 벌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이필제의 신분이 탄로 나지는 않았다. 이때 이필제와 김낙균 그리고 최시형, 강시원 등 지도부는 도망을 쳐서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 이필제는 왜 스스로 물러났을까?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겠다. 하나는 계획한 만큼 봉기군의 숫자가 모이지 않았고 무기도 넉넉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오래 계획을 벌이면서 하나의 시험무대로 영해부를 습격하고 나서 역량을 확인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필제와 김낙균이 그 뒤에 벌인 일로 보아도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이필제는 여러 차례 봉기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처음으로 영해부 습격이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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