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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4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시죠

,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시죠?"

손수건으로 눈가의 마른 눈물을 닦고 나서 물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는지 처음보다 많이 진정된 목소리였다.

"
나는 그저 길을 가는 사람이야."

저를 아세요?”

아가씨는 잘 몰라도 내가 누군지는 잘 알지.”

한의사세요?"

아냐."

그럼……. , 도사세요?"

남들이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 내가 누군지 알려고 하시기 전에 자신이 누군지나 잘 아시게.”

도사님, 저를 도와 주세요!"


당연하지! 내가 소희의 마음의 병을 고쳐 줄 생각이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말도 걸지 않았을 것이며, 약을 먹으라고 권하지도 않았을 걸세. 내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사니까 소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말을 해 봐.”

일행인 사내가 시계를 보더니 일어났다.

성 선생님, 저는 이만…… 거래처 손님을 만나기로 해서.…..….”성 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허리를 깍듯이 꺾고는 빠른걸음으로 다방을 나갔다.

이소희는 엽차로 목을 축이고는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다가 주위를 의식한 건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가씨의 억양이 높아지기도 하고 때론 낮아지기도 해서 모두 들을 수는 없었지만 교제했던 남자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 같았다.

나는 귀를 기울인 채 교보문고에서 산 시집을 건성으로 훑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길었다. 성 도사는 간혹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고 그녀는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야기는 과거에 사귀었던 남자들로부터 현재 교제하고 있는 남자 친구로 이어졌다. 얼추 듣기로는 남자의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데다 사귀는 남자의 질도 안 좋아 보였다.

비는 멈춰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분침이 두시 이십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병걸이와 두시 반에 만나기로 했으니 약속 시간까지는 십 분이 남아 있었다. 조계사 앞의 다방까지 가려면 지금 일어서야만 했다. 그러나 성 도사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나의 발목을 꽉 잡고 있었다.

나는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두 사람의 중년 사내와 두 명의 아가씨들이 각본을 짜고 벌인 사기극이 아니라면 성 도사의 정체가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도사라고 하더라도 처음 만나는 여자를 보고, 사흘 전에 여섯번째 낙태수술을 했으며 현재 어디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는 것까지 훤히 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전에 선()공부를 할 때나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도사라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 보았지만,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들의 태도로만 본다면 사기극 같지는 않았다. 사기극이라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것이 상례인데 이소희라는 아가씨는 다방 아가씨들과 나의 시선을 도리어 기부하고 있었다.

소희의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지?"

이상한 기운이 실려 있는 성 도사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가씨가 뭐라고 입술을 달짝였다. 성 도사가 주름진 바바리코트에서 만세력을 꺼내 들고 만년필로 종이 위에다 사주를 적었다. 점장이?

낯익은 만세력을 보니 성 도사에 대한 궁금증이 더했다. 성 도사가 점장이라면 사주를 적은 뒤에 낙태가 어떻고, 건강이 어떻고 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아무리 신통한 점장이라도 사주를 보고는 몇 번 낙태했다는 것까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내가 지니고 있는 지식이었다.


얼굴만 보고도 살아온 날들을 훤히 알면서 사주팔자는 왜 보는 것일까?

성 도사의 말과 행동은 이미 내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문득, 성 도사가 소희라는 아가씨에게 자신의 말을 믿게 할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 만세력을 건성으로 펼쳐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를 양력으로 작년 칠월에 처음 만났다고 했지?" “.”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와는 좋은 인연이 아냐. 헤어져! 그 남자에게는 이미 다른 애인이 있구만!"

? 저 말고 다른 여자가 있다고요?"

그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로서도 성 도사의 말은 뜻밖이었다. 여자 사주만 펼쳐 놓고, 사귀는 남자에게 다른 애인이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니….….

소희를 만나기 전부터 알던 여자야! 소희에게는 이미 마음이 떠났는데 그 동안의 정 때문에 관계를 질질 끌어 왔던 거야. 소 귀에 경 읽기지. 쯧쯧 그런 사내를 붙잡고 결혼하자고 매달렸으니 그 남자를 탓할 것도 없어. 시작부터 잘못된 만남이구만! 내말이 틀려?”

, 그건……. 그렇지만…….”

차라리 잘 됐네! 그 남자와 헤어짐으로 해서 내후년 삼월에 좋은 남자와 인연이 닿는구만 그래. 그 동안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줄 수 있는 멋진 사내야!”

!”

소희가 탁자 위에 머리를 태고 울음을 삼켰다.

이 바보야, 울긴 왜 우니? 좋은 남자 만난다는데……. 소희야, 미련 갖지 말고 성 도사님 말씀대로 해! 그러기에 내가 뭐랬니? 명준 씨하고는 진작 헤어지라고 그랬잖아!”

영미라는 아가씨가 소희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소희

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다시 한참을 울었다.

정말로……. 성 도사의 얘기가 모두 맞는단 말인가?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 사람 사주를 놓고 궁합을 보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세세한 것까지 맞출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희가 한 이야기를 듣고 성 도사가 어림짐작으로 말한 것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기극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더 강하게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