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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해 동학혁명의 발생 배경 및 원인

1) 역사적 문화적 배경

 

왜 그 당시 경상도 영해에서 다른 지역보다 먼저 동학혁명이 발생했는가? 영해혁명을 규명하는 데는 가장 먼저 역사적 배경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영해는 조선말까지 도호부사가 관장하는 큰 도시였다. 고려시대에는 예주로서 동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도호부사를 두어 수군만호를 두었다는 것이 조선시대에도 동국여지승람 영해도호부 편에 기록되어 있다. 또, 이곳 출신 명인들이 많다. 조선왕조 유림정치의 산파역할을 하게 된 목은 이색(괴시리), 고려 공민왕 스승 나옹왕사(가산리), 퇴계학파의 맥을 이은 갈암 이현일(인량리) 등이 태어났다. 또, 몽고군의 침략을 막은 박송비 장군, 서원교육의 효시 안향, 조선시대 영남학파 거두 점필제 김종직 등은 영해부사를 지낸 인물들이다. 당시 영해부가 다른 지역보다 정치적 경제적 규모가 컸다는 점은 넓은 들의 농산물과 풍부한 해산물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위대한 인물이 많았다는 것은 백성들이 자각할 기회가 많았다는 점이다.

 

문화적 배경을 보면 아녀자들은 내방가사(內房歌辭)를 규수 때부터 익혀서 자녀들의 혼사 때는 사돈지라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러한 글솜씨를 익혀온 전통이 있어 표현력이 부족하면 얕잡아 보는 풍습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의 집 종살이나 머슴살이를 해도 입과 귀로 전하는 오늘날 구연동화와 같은 이야기 거리는 보통 천 가지 이상 귀로 듣고 입으로 전할 수 있어야 했다. 이는 서양문화를 귀로 듣고 입으로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해지방의 문화적 배경은 왕조시대의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극소수 특권계층만이 온갖 호시를 누리는 것은 한개에 달했음을 인식하였다. 대부분의 평민과 노예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자유와 핑등이 존재하지 않고 억압당하는 실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조선왕조 끝 무렵까지 신분세습으로 노비 계층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여 성씨도 없이 이름만 있었다. 이는 두 명의 관노비가 교남공적(驕南公蹟) 문서에도 나온다. 노비문서는 인신매매의 증거이고 의관착용은 신분을 얽어매는 도구였다. 『신미아변시일기』 3월 17일자를 보면 동학인을 잡아 가둔전과가 있는 6명을 무조건 다시 잡아들이라고 했다. 이어서 “6, 7년 전부터 동학당의 일원이었고, 여러 읍이 서로 통하여 같은 유형의 동학을 믿어 왔는데 지하로 숨어서 어려운 빈한한 마을에 거주하며 동학교도들을 설교하는 일을 해 왔다.… 신분서열상 의관은 순서가 완고하고 영내에 가둘 사람은 그칠 줄 몰랐다.”고 쓰고 있다. 수운 교조가 순교한 1864년 이래 6, 7년동안 동학 탄압이 얼마나 심했고, 신분의 굴레로 얽어맨 의관착용에 대한 단속이 심했는지를 알 수 있으니 영해 동학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영해지방에는 신라시대 박제상의 후손들이 영해박씨로 정착해서 살고 있다. 또 조선왕조 태조실록을 보면 고려 왕손을 삼척에서 배에 띄워 난파시키고 며칠 후 왕씨(王氏) 성을 쓰지 못하도록 금압령을 내렸다. 당시 예주(禮州 : 영해로 변경한 것은 조선 태종 때임)지방에 살던 왕씨가 전씨(田氏)로 바꾸어 살며 몰락한 귀족들이 설움을 참고 살아온 정서가 흐르는 지역이었으니 새로운 개벽을 갈망했던 욕망이 큰 지역이다.

 

2) 동학의 교조인 수운 선생의 순교

 

왕조시대에 통치이념은 재세이화 홍익인간(在世理化 弘益人間)이었다. 서양에서도 종교적 사상은 인간을 흙으로 창조한 신의 피조물로 가르쳐 왔고 불교 마져도 무아의 경지인 허무적 존재로 인간을 각인하여 왔다. 왕조시대는 인간을 널리 복되게 한다는 억압의 수단으로 통치자가 백성들을 교화한다는 것으로 신분상의 평등과 자유가 없이 다스림 대상이었다. 이는 신분상 차별이 엄존할 뿐 모든 인간이 동등한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자존(自尊)은 존재할 수 없었다. 수운 최제우는 인간과 신이 동일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1861년 신유년 6월에 동학을 포덕하는 글을 짓고 논학문 등으로 동학을 포교하였다.

 

1863년 10월 28일 영덕의 직천마을(지금의 강구면 원직리, 상직리) 강정(강흠이 동일인, 강수의 아버지)의 주점 및 여관집에서 수운 최제우의 생일 잔치를 준비했다. 생일잔치에 모인 수많은 제자들 앞에서 무극대도(無極大道) 후천개벽(後天開闢) 오만년(五萬年) 자존(自尊)의 시대가 도래함을 알리게 되었다. 그때 발언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태초에 인간 세상에 처음 나온 성인은 광음을 일으켜 세운 천황의 성덕이 크면 특별히 교육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저절로 잘된다는 것이 선천개벽이다. 이번에 세상을 구하고자 창립하는 무극대도인 나의 가르침은 후천 오만년 미래에 도래할 운으로서 자존(自尊)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세주는 옛 천황씨의 선천인 즉, 모든 사람이 존귀한 자존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곧, 바뀌는 미래의 운이 모인다는 말을 귀에 담아 전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던 시대였다. 간간히 죄인을 방면한다고 할 때 자유라는 말은 쓸 정도였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밀. S. Mill)이 『자유론』을 쓴 것을 일본에서 번역하고 중국의 양계초가 『음빙실문집』 에서 재정립하고 우리나라는 이상룡(李相龍)의 『석주유고(石洲遺稿)』에 본격 소개한 '자유도설'에서 알려지고 1900년부터 보편화되어 언론매체가 태동하던 시기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운 선생이 생일잔치에서 설파한 자존과 무극대도의 평등사회는 오늘날 자유와 평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못 되는 11월 20일, 정부에서는 선전관 정운구(鄭雲龜)를 암행어사로 보내어 수운 교조를 처벌하는 밀명이 내려졌다.

 

1863년 12월 20일 암행어사 정운구가 올린 장계가 기록된 왕조실록을 보면 시천주(侍天主)라고 명명된 21자 주문(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至氣今至願爲大降(지기금지원위대강)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는데 그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조령(鳥嶺)에서 경주까지는 400여 리가 되고 주군(州郡)이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천주(爲天主)'라고 명명하고 또 '시천주(侍天主)'라고 명명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한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염되고 번성한지를 이를 통해서 알 만합니다.

 

그것을 전파시킨 자를 염탐해 보니, 모두 말하기를 최선생(崔先生)이 혼자서 깨달은 것이며 그의 집은 경주에 있다.'고 하였는데, 만 사람이 떠드는 것이 한 입으로 지껄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

 

정운구가 수운 선생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 과천에 이르러 철종의 국상이 났다. 다시 대구 경상감영으로 보내어 문초하라는 어명이 내려져 12월 29일 문경새재에 당도하였다. 문경새재부터 동학을 모르는 이가 없고 소문만으로도 많은 제자들이 모이 들었다. 동학접주(東學後上) 이필재(李家.濟)가 인솔한 도인 수백 명이 고갯마루(上)에 내려섰을 때 일시에 모여들어 매복하였다가 수운이 탄 수레를 탈환(溫)코자 하였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수운은 길가의 바위 위에 올라가서 이필게 겁주(李濟 接主)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한 것이 암상설법(考上法)이라고 부른다.

 

"그대들이 폭력으로 나를 탈환코자 하나 나의 이번 길은 하늘의 명(天命)에서 나온 것이니 안심하고 돌아가라.

 

그대들이 지금 나의 육신(肉身)을 구출코자 하나 육신은 짧고 성령(靈)은 영원무궁(永遠無窮)한 것이니 짧은 나의 몸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영원무궁한나의 성령을 구하도록 하라. 그대들이 진실로 나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고 전인류(全人類)를 구하고 그대들도 잘 살고 천하창생(天下生)이 모두 다 잘 살게 하려면 이 자리에서 나의 몸을 탈환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항상 말한 것을 잊지 말고 각자가 집으로 돌아가서 지극한 정성으로 37자 주문(呪文)을 무시로 다독하고 정성과 공경과 믿음(誠敬信)을 각별하게 지켜서 마음을 바르게 도를 닦는 일(正心修道)에 전심전력(專心事力)하라.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나는 장생(長生)한다.”

 

고 설파하였다고 한다.

 

그 후, 수운의 사형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동학의 우두머리 최제우, 사술로서 사람들의 질병을 고친다고 했고, 주문으로 국가민족을 기만했고, 칼 노래로 국정반역을 모의했고, 간사한 도로서 속이 바른 질시를 문란시컸으므로(시도난징 1) 치형함을 선고한다."

 

수운 선생은 갑자(1了· 186)년 3월 10일, 대구 관덕정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