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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7 “삐삐를 찬 도사?”

"내가 소희의 사주를 봐 준 것은 복채를 원해서가 아니야. 소희의 얼굴을 보니까 소희의 살아온 날들이 보였고, 현재 가야 할 길을 잃고서 엉뚱한 곳에서 배회하고 있기에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르쳐 준 것뿐이야. 영미는 지금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데 내가 그 길로 쭉 가라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두 번 부정은 긍정이 아닌가? 한참 공부하고 있는 아이 보고 자꾸 공부하라고 하면 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돼. 만일 내가 아가씨의 사주를 본 뒤 약혼자하고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지겠어?


그것 봐, 벌써 마음이 산란해지잖아! 자신과 약혼자와의 궁합이 좋지 않아서 내가 일부러 봐 주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기고……. 가만히 있으면 속 편한 것을 뭣하러 사주를 봐서 고민을 만드나? 행복은 사주팔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속에 있는 거야. 한 생각 돌리면 바로 그곳에 행복이 있는 것을 왜 행복을 멀리서들 찾나? 아가씨들, 난 이만 가겠어. 소희는 오늘 내가 한 말 명심해!”

성 도사는 삐삐를 다시 옆구리에 차며 말했다.

오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성 도사가 일어서자 두 아가씨도 엉거주춤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성 도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냥 지나쳐 가는가 했더니 다시 돌아왔다.

이봐, 젊은이! 혹시 예전에 나를 만난 적이 있나?"“아뇨! 처음 뵙는 걸요."

나는 순간, 바짝 긴장해서 성 도사를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호기심도 일고 해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래? 언젠가 본 듯한 얼굴이야. 그렇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그는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돌아서서 나갔다. 부풀어올랐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렸다.

아니란 말인가? 사기극이…….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성 도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이 규칙적으로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 왔다.


소희야? 너 정말 그 아저씨 모르는 사람이니?”

…….

도사가 아니라 귀신이다, ! 이 자리에 없는 명진 씨와 너의 관계까지 소상히 알다니…….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연락처라도 좀 알아 놀 걸…….”

그런데. 명진 씨에게 숨겨 놓은 애인이 있다는 게 사실일까?"

"
, 바보야! 그만큼 속고도 모자라 또 속고 싶어서 그러니? 영희가 같이 있는 걸 봤다는 그 여자가 분명해! 명진 씨는 너에게 사촌 동생이라고 그랬다며? , 밤 늦은 시간에 어떤 오누이가 다정하게 남산타워에서 식사를 하겠니?”

시계를 보았다. 두시 오십분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차 드셔야죠. 그만 정신이 없어서 …….”

옆 테이블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가씨 중의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다음에 와서 마실게요. 약속 시간이 다 돼서……. , 아까 그 성 도사라는 분 여기 종종 오나요?”

나는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돌아서서 물었다. 그냥 다방을 나서려고 하니 기분이 찜찜했다.

아녜요! 오늘 처음인 걸요. 왜요?”

, 아닙니다. 다음에 들를게요!”

서둘러서 다방을 빠져 나왔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성 도사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조계사 쪽으로 향했다.

정말 도사였단 말인가?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문득, 삐삐를 꺼내 들여다보던 성 도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삐삐를 찬 도사?”

혼잣말을 해 보았다. '도사'라는 낡은 호칭과 '삐삐라는 첨단 기계가 부딪쳐 일으키는 불협화음을 듣다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사내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에 잡지사에서 근무할 때 자칭 도사라는 사람들을 여럿 취재해 보았지만 성 도사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간혹 영()이 들린점장이나 무당이 지난 과거를 거울 들여다보듯이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불쑥불쑥 내뱉을 뿐 성 도사처럼 논리가 정연하지 못했다. 그를 도사로 인정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투와 몸짓에서는 신들린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자유로움이 물씬 풍겼고, 그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나를 계속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 도사를 붙잡고 좀더 이야기를 들어 볼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스며들었다. 어쩌면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였는데,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래, 옷차림을 보니 산에서 사는 사람 같지는 않았어. 그의 말처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애써 자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조병걸과 약속한목마에 들어서니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실내를 두 바퀴나 돌았지만 병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양쪽 출입구를 번갈아가며 볼 수 있는 중앙의 테이블에 앉았다.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죽어 간 가수의 노래가 살아 남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익은 사랑노래를 건성으로 들으며 종업원이 놓고 간 엽차잔을 홀짝거리고 있는데 DJ가 내 이름을 불렀다.

손님 중에 신현수 씨, 신현수 씨! 카운터에 전화 와 있습니다.” 두리번거리는 다방 마담에게 손을 들어 보인 뒤 카운터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신현숩니다.” 

현수니? , 미안하다. 모처럼의 약속을 어겨서……. 급히 취제할 꺼리가 생겨서 말야. 내일 만나자. 내일은 내가 오전중에 너의 집으로 찾아길게, 그 동안에 우렁이 각시라도 데려다 놓은 건 아니겠지? 품는다!”

나는 먹통이 된 수화기를 한동안 멍히 들고 서 있었다. 순식간에 끊겨 내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